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정지홍/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2/08/27 [17:4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애통하는 것은 가슴이 찢어지도록 처절하게 우는 것이다. 너무도 슬퍼서 가슴을 치며 소리내여 통곡하는 것이다. 어떻게 통곡하는 사람이 복이 있을 수 있을까? 아무리 좋게 봐줘도 가슴이 찢어지도록 애통하는 사람이 어떻게 행복할 수가 있겠는가? 

애통하는 자 누구인가?

과연 애통하는 자들이 누구이기에 그들이 복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남의 슬픔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자가 애통하는 사람일까? 다른 사람의 재난이나 불행을 보고 내 일처럼 슬피 우는 자들일까? 아니면 부모나 형제를 잃고서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에 애곡하는 자일까?

물론 그들도 애통하는 자들일 수 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을 때 우리는 크게 애통하게 된다. 그리고 타인의 아픔과 상처 때문에 내 일처럼 흘리는 눈물은 분명 고귀한 눈물일 것이다. 그러면 이 같은 애통이 과연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있는 애통일까?

산상수훈은 그냥 은혜로운 덕담이 아니라 예수님이 천국으로 초대하시는 말씀이 분명하다. 그런데 내가 남을 위해 운다고 해서 나에게 천국 문이 열릴까? 내가 아무리 부모님을 위해 울고, 자식을 위해 울어도 하나님의 나라는 내게 열리지 않는다. 내가 남의 아픔과 상처 때문에 몇 날 며칠을 눈물로 지새운다고 해도 그 눈물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애통은 누구를 위한 애통이겠는가? 바로 나를 위한 애통이다. 나 자신을 바라보며 우는 것이다. 내가 너무도 불쌍해서 애통해 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나 때문에 슬피 우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의 욕망과 거짓과 이기심을 바라보며 애통하는 것이다. 주님에 대한 배신과 불신을 통회하며 우는 것이다. 질병과 실패와 좌절로 인해 그저 가슴이 찢어도록 우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애통하는 자다. 내 안에게는 선한 것이 아무 것도 없고 오직 절망 밖에 없어서 그저 하나님 앞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자가 애통하는 자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에, 그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우는 자, 그들이 애통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바로 그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그들이야말로 하늘의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애통하는 자들의 은혜

요셉의 이야기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은 요셉이 자신을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을 만나는 장면이다. 요셉에게 있어서 형들은 결코 잊지 못할 원수 같은 존재였다. 형들에게 버림을 받은지 20년이 지난 어느 날, 애굽의 총리였던 요셉은 극심한 흉년을 맞아 곡식을 꾸러 온 형들을 만나게 된다. 자신을 노예로 팔아버렸던 원수와도 같은 형들은 마침내 만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요셉이 그 형들을 보고서 한 일이 무엇이었나? 우는 것이었다.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그 때에 그와 함께 한 다른 사람이 없었더라 요셉이 방성대곡하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창 45:1-2).

요셉은 형들이 찾아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가운데 곡식을 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을 보면서 울었다. 치밀어 오르는 형제의 정을 억제하기 못하고 큰 소리로 울었다. 얼마나 크게 울었던지 애굽 사람에게도 들렸고 바로의 궁중에도 들릴 정도로 방성대곡을 했다. 자기를 버렸던 형들을 보고, 요셉이 할 수 있는 애통하는 것 뿐이었다. 

당연히 요셉의 애통은 동생이면서도 교만했었고, 아버지의 편애를 자랑하면서 형들의 시기심을 유발했던 자신의 이기적인 옛 모습에 대 애통이었다. 뿐만 아니라 원수와도 같았던 형들을 용서하는 사랑의 애통이었다.

그 이후의 상황이 이렇다. “요셉이 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우니라 요셉이 또 형들과 입 맞추며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서야 요셉과 말하니라”(창 45:14-15).

요셉도 울고 아우 베냐민도 울고 형들도 울었다. 서로 부둥켜안고 함께 울었다. 요셉을 노예로 팔아넘긴 형들이 20년 만에 요셉을 보고서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애통하는 것뿐이다. 우는 것 밖에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오랜 기간 동안 그들을 얽매였던 형제들 간의 원망과 비탄, 복수심과 자책이 모두 사라졌다. 그들이 애통해 하자 하나님이 그들에게 위로를 주셨다.

요셉의 이야기뿐만이 아니다. 성경은 온통 애통하는 자와 그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히스기야 왕은 이사야 선지자로부터 곧 병들어 죽게 될 것이라는 시한부 인생의 선고를 받았다. 그것은 이사야의 말도, 의사의 말이 아니었다. 지엄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러니 히스기야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는 것 뿐이었다. 낯을 벽으로 향하고 통곡했다. 사망선고를 받은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 엎드려 통곡하는 것 뿐이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왕하 20:5). 히스기야는 분명 애통하는 자였다. 죽음의 질병 앞에서 하나님께 통곡하며 기도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의 눈물을 보시고 그를 위로하시고 그의 생명을 15년이나 연장시켜 주셨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했던 배신자 베드로가 어떻게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지도자가 될 수 있었는가?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마 26:75).

자식이 없었던 한나가 어떻게 이스라엘 최고의 선지자 사무엘을 낳을 수 있었는가?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삼상 1:10).

느헤미야가 어떻게 140년 동안이나 무너져 있던 성벽을 재건할 수 있었는가?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 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느 1:3-7).

하나님이 베드로의 애통을 보셨고, 한나의 애통을 보셨고 느헤미야의 애통을 보셨다. 그리고 그들을 모두 위로하셨다. 그 결과 베드로는 초대 교회의 가장 위대한 사도가 되었고, 한나는 이스라엘 최고의 선지자 사무엘을 낳았으며, 느헤미야는 140년 동안이나 폐허로 남아 있던 성벽을 단 52일 만에 재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정말 복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뿐만이 아니다. 예수님도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이 기도가 바로 겟세마네의 기도다. 땀 방울이 핏방울이 되었던 그 기도는 심한 통곡과 눈물을 동반하는 기도였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조차도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서 하나님 앞에서 통곡하고 눈물 흘리며 기도하시는 애통하는 자가 되셨다.

울어야 행복하다

하물며 우리이겠는가? 우리도 울어야 한다. 애통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울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서 흘릴 눈물이 너무도 메말라버렸다. 영혼은 갈급해 하면서도 울지 않는다. 

우리는 행복하기를 원하면서도 애통해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날마나 불행하다고만 여긴다. 사는 게 힘들다고 한숨만 내쉰다. 힘들어 죽겠다고 탄식만 한다. 병들어 아프다고 염려만 쌓아간다. 더욱 가관인 것은 신앙 양심에 화인을 맞아서, 허물과 욕망이 내 안에 가득한데도 도무지 반성할 줄도 모르고 회개할 줄도 모르고 뻔뻔하기만 해서, 하나님 앞에서 왜 울어야 되는지 그 이유도 모른다는 것이다.

영혼이 병들었는가? 인생이 답답한가? 질병 때문에 고통당하고 있는가? 하나님 앞에서 울어야 한다. 울어야 산다. 제발 용서해 달라고, 제발 도와달라고, 제발 고쳐달라고, 제발 살려달라고 애통해야 한다. 그렇게 울어야 행복해질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 애통해 보라, 눈물로 하나님을 만나 보라.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며 위로해 주실 것이다. 하늘의 복을 내려주실 것이다.〠
 

정지홍|좋은씨앗교회 담임목사 blog.daum.net/goodseed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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