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요일 4:7-20)

정지홍/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2/10/24 [16:24]

교회에서 하는 말 중에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이 말보다 아름답고 좋은 말은 없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듣기에도 좋고, 말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 그리고 그 교회에 속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이 말을 꺼냈다고 하는 것은 당시의 교회가 서로 사랑하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내가 먼저 사랑해야 한다

 

요한은 먼저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썼다. 이 말은 ‘사랑한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고 있다’는 고백이다. 그 다음이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다. “사랑하는 자들아”가 먼저이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가 그 다음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시작이 ‘내가 먼저, 나부터’임을 알게 된다.

 

요한이 본문의 독자들을 먼저 사랑했듯이 내가 먼저 교인을 사랑하고, 내가 먼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서로 사랑’의 시작이다. 즉 내가 먼저 사랑하지 않고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이 말을 꺼낼 수 없다.

 

나는 사랑하지도 않는데, 나는 그 사람이 밉기만 한데, 어떻게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라고 말할 수 있나? 내가 이해하고 내가 먼저 배려하고, 내가 먼저 용서하고, 내가 먼저 도와주고, 내가 먼저 사랑할 때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7-8)

 

사랑은 이 세상에 있는 것도 아니고,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또 어느 날 갑자기 우리 마음속에서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사랑의 원천, 사랑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사랑하는 자는 모두다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다. 또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게 된다. 반대로 사랑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알 수 없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사도 요한은 거듭해서 강조한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15:20)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이다.

 

형제를 미워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워하면서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누군가를 미워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체하면 그것은 거짓이 분명하다.

 

게다가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요한은 단호히 말한다.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눈에 보이는 형제도 사랑하지 못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는 것은 뻔한 일이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 수도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눈에 보인다고 해도 사랑할 수 없다. 형제를 미워하는 한.

 

흔히 ‘애증의 관계’라는 말을 하는데, 하나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애증은 사랑과 증오 즉 사랑하면서 미워하는 것인데, 사랑에는 미움이 없다. 사랑에는 사랑만 있다. 그래서 형제를 미워하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더욱이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 3:15)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살인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쉽게 미워하지 말라.

 

아니 절대로 미워하지 말자. 미워하는 건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살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라

 

요한은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고 한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 하나님이 허물많은 우리를 먼저 사랑해 주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할 일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이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직접 체험해야 한다. 그래야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때의 ‘사랑’은 모두 아가페다. 아가페는 '무조건적인 사랑, 온전한 사랑, 변함이 없는 사랑'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가페로 사랑하시는 만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무조건적으로, 온전하게 변함없이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과 똑같이 ‘아가페’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는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9-10)

 

하나님은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하나 밖에 없는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다. 그리고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의 화목 제물이 되게 하셨다. 우리를 대신해 예수님을 못박혀 죽게 하셨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게 십자가에 나타난 바 되었다.

 

세리장이었던 삭개오는 여리고에서 가장 큰 부자였지만 늘 외로웠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만 받았지 사랑은 받지 못했다. 돈은 많았지만 그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삭개오를 예수님이 찾아오셨다. 그리고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라고 하셨다. 삭개오는 난생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런데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예수님의 그 말씀이 삭개오에게는 ‘사랑한다’는 말로 들렸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동안 외롭게 살았던 삭개오,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살았던 삭개오는 너무나 큰 감동을 받았다.

 

그러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말을 한다. “주님,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남의 것을 속여 뺏은 것이 있으면 4배로 갚겠습니다.”

 

이것은 삭개오 식의 사랑 고백이다. 이웃을 사랑하겠다는 고백, 서로 사랑하겠다는 다짐이었다. 예수님의 사랑을 뜨겁게 체험한 삭개오는 가만 있을 수 없었다. 전승에 따르면 여리고의 큰 부자였던 삭개오의 나눔, 그 사랑의 나눔으로 여리고에는 굶주리거나 빈궁해서 고통 받는 이들이 없었다고 한다.

 

또 삭개오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가이사랴 교회의 첫 번째 담임 목회자가 되었고, 그 다음에 지금의 프랑스 지역인 갈리아에서 선교하다가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삭개오는 죽는 날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며 “서로 사랑하는 일”에 매진했던 것이다. 이 모든 일이 그날 뽕나무 위에서 체험한 주님의 사랑에서 비롯되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면 누구나 삭개오가 될 수 있다.

 

서로 사랑하자

 

내 안에 사랑이 들어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사랑하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저절로 서로 사랑하게 된다. 이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뜨겁게 채워졌는데, 나를 살리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온 몸으로 체험했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감기에 걸리면 몸에 열이 나고 얼굴에도 표가 난다. 밥을 많이 먹어도 배가 불러오고, 선물을 받으면 절로 미소가 나온다. 하물며 나를 살리시고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했는데, 어떻게 그 사랑이 밖으로 나오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어느 시대에도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그 공동체 안에 하나님이 거하신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서로 사랑이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의 사랑이 비로소 우리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진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샬롬! 〠

 

정지홍|좋은씨앗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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