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나를 써 주옵소서

원영훈/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2/12/23 [15:03]

 

 

한국에서 첫 목회를 26살에 충청남도 서산에서 시작했다. 서울에서 태어나 목회 나갈때까지 서울에서만 지내서 시골이 낯설을 수 있었지만 아버님 고향이 강원도 원주 시골이어서 방학 때 원주에 가서 시골 생활을 해서 그런지 정말 정감 넘치는 곳이었고 마음이 따뜻한 곳이었다.

 

인심도 좋아 사택에서 김치를 거의 담가서 먹은 적이 없다. 성도들이 집에서 김치를 담글 때 일부러 목회자 가정을 위해 더 담가서 가져다 주곤 하였다. 그래서 사택 냉장고에는 내가 좋아하는 총각김치를 비롯해 배추김치, 석박지, 깍두기, 동치미 등 갖가지 다양한 김치들이 끊이지 않고 있었던 기억이 있다.

 

거기다 충청도 양반 아니던가. 대부분 연세 드신 분들이었지만 나이로 따지면 아들뻘 혹은 손주뻘 되는 젊은 목회자를 당신들의 영적지도자라고 깍듯이 대해 주시던 기억은 지금도 그곳에 대한 애틋함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목회하기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비슷한 경우를 여러 번 경험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경험은 이곳 호주 목회에서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 신기하며 아름다운 경험이다.

 

한국에는 호주와는 비교할 수 없는 추운 겨울이 있다. 서산은 바닷가 쪽이어서 그런지 그래도 다른 지역보다 덜 추운 지역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겨울은 겨울이었다.

 

어느 추운 겨울 밤에 아내가 갑자기 이런 말을 했다.

 

“군고구마를 먹고 싶다’는 것이었다. 추운 겨울밤에 먹는 군고구마 얼마나 맛있는가? 그러나 늦은 시간에 어디 나가서 고구마를 구할수 없는 상황이어서, 말로만 ‘먹으면 좋겠네’ 하는 수준에서 말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사택 바로 옆에 붙어있는 교회에 가서 새벽기도를 마치고 사택으로 들어오는데 사택 문 앞에 검은 비닐 봉지가 놓여있는 것이었다. 종종 새벽기도 오신 분들 중에 김치를 놓고 가시는 분들이 계셔서 혹시 김치인가 하고 사택에 들어와 열어보니 그 봉지 안에 먹기에 딱 좋은 고구마가 들어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보고 아내와 함께 놀라기도 했지만 같이 웃음이 터지는 것이었다. 놀란 것은 바로 몇 시간 전인 전날 밤 잠자리에서 군고구마 먹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는데 바로 다음날 고구마가 문앞에 있는 것이 놀랍기도 하였고, 웃음이 나온 것은 우리의 말을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곧장 어느 성도를 통해 가져다 준 것이 참으로 신기하기도 하면서 재미있기까지 한 것이었다.

 

이것은 필자의 경험만이 아니라 목회하는 다른 분들도 이런 비슷한 경험을 하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경험을 여러 차례 경험한 이후로는 언젠가는 아내와 어떤 필요에 대하여 말을 해놓고 ‘다음날 그렇게 되는지 보자’ 라고까지 하기도 했다.

 

최근에도 같은 경험이 있었다. 귤을 좋아하고 거기다 감기 기운이 있어서인지 귤이 먹고 싶었다. 요사이 귤이 필자가 살고 있는 지역의 마켓에 가면 제철이 아니어서 그런지 구경을 할 수가 없다. 그나마 판매대에 있는 귤도 그렇게 싱싱한 것은 아니어서 선뜻 귤을 사지는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귤이 너무 먹고 싶은데 아내에게 ‘귤 좀 먹었으면 좋겠네’라고 말하고 바로 다음날 교회갔는데 어느 성도께서 작은 쇼핑백을 주시며 잘 드시라고 했다. 집에 와서 열어보니 병에 든 귤차였다. 이럴 때마다 항상 그러하듯 놀랍기도 하면서 웃으면서 그것을 먹는데 얼마나 몸에서 좋아하는지 귀하게 먹으며 참 감사했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 139:4)

 

우리의 말을 다 듣고 계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니 어떤 때는 말 실수 할까봐 두렵기도 하면서, 이렇게까지 세밀하게 함께 하시고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 그분이 너무 든든하고 감사하기까지 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 섬김에 쓰임받으신 분들에 대해 또 생각하는 것이다. 그분들은 하나님의 기억 속에 계신 분들이라는 것을... 마치 기근을 만나 먹을 것이 없는 시대에 하나님은 그분의 종 엘리야 선지자를 하나님의 기억 가운데 있던 사르밧 과부를 통해 살리셨고 그 과부의 가정도 책임져주셨던 것처럼 말이다.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 (왕상17:9)

 

주님의 일에 주님이 기억하시고 쓰시는 사람. 가져다 준 본인은 자신이 그렇게 섬긴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위대한 일’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했을 것이다. 그럴지라도 그분은 하나님이 기억하신 자로서 선한일에 귀하게 쓰임 받으신 것이다.

 

 

하루하루를 그저 살아가는 것 같은 우리의 일상이 하나님의 기억과 인도하심 가운데 누군가를 세우고 살리는, 하나님의 선한 일에 쓰임받는 의미있는 삶이 되는 것! 얼마나 우리 모두를 부요케 하고 아름답게 하는가!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사 6:8)〠

 

원영훈|케언즈한인연합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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