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는 2017년에 국민의 자발적 우편투표를 실시하여 61.6% 찬성으로 동성결혼을 합법화했다. 정면으로 하나님께서 창조 때에 세우신 질서를 뒤엎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는 길을 택한 것이다. 중요한 점은 방법이었다.
자격이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발적인 선택을 할 수 있게 한 가장 민주주의적인 방법이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민주주의를 염려하지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 식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뜻을 모았다고 해서 그것이 진리가 되는가?
모든 가치를 이렇게 더 많은 사람들이 예스라고 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도 되는가? 민주주의를 절대 진리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옳은 것인가? 현대로 오면 올수록 사람들은 종교를 버리고 있다. 지금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종교는 무신교라고 말한다.
현대인들은 기독교의 하나님만 버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들을 다 버리고 있다. 그리고 신을 버린 그 자리에 민주주의를 절대 진리로, 기준으로 세워가고 있다. 다시 질문해보자. 더 많은 사람들이 뜻을 모았다고 해서 그것이 진리가 되는가?
기독교의 대답은 성경의 대답은 결코 그렇지 않다가 대답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기독교는 궁극적으로는 민주주의가 아니고 민주주의가 아니어야 한다.
물론 이 말은 한편으로는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말처럼 들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말은 의미가 있다. 기독교의 관점에서 볼 때 민주주의라는 말은 그 자체가 맞지 않는 차원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국민이 주인이라는 주장인데, 우리 기독교는 결코 사람이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이시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는 기독교인들이 멀리 해야 할 제도요, 버려야 할 제도요, 반대해야 할 제도인가? 그렇지는 않다. 현재로는 인류 역사상 가장 발달된 삶의 형태가 민주주의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기독교는 이 민주주의를 좋아하고 옹호하고 보호하기까지 한다. 왜 민주주의가 국민이 주인이라고 가르치는데 기독교는 좋아하는가? 그런 가르침은 기독교와 정반대가 아닌가? 중요한 질문이다.
기독교가 민주주의를 좋아하는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국민이 주인이라고 주장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역사의 주인이 국민 또는 사람이라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이 주인이시다는 것을 가장 크게 인정하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이 점을 놓치고 민주주의를 주장하면 철저한 인본주의로 빠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가장 민주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장 반(反) 하나님 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전체주의 밑에 있던 동양의 많은 나라들이 서양의 민주주의를 배워 따라 하고자 할 때 서양사람들이 시작한 민주주의 밑에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주인이시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는 것을 놓치고 오로지 국민이 주인이라는 생각만 가지고 민주주의를 시행할 때 잘 안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민주주의가 하나님이 주인이시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고 오직 사람들이 주인이라는 점만을 붙잡을 때 그것은 가장 좋은 제도가 아니라 가장 나쁜 제도가 될 수 있다. 이 점은 교회에도 적용할 수 있다.
가장 민주주의적으로 교회를 운영한다고 해서 그 교회가 다른 교회들보다 꼭 더 건강하거나 특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이 되는 것은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방법은 가장 민주적이어도,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시지 않는 상태가 얼마든지 될 수 있다.
성경을 보자.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힌, 성령충만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셨지, 군중들을 직접 움직여 일하신 적이 거의 없다.
민주주의의 최대의 약점은 그 구성원이 준비가 안 되어 있는데 그 구성원들이 가장 좋다고 합의하기만 하면, 그것을 선이나 기준으로 삼으려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 100명의 도둑이 모여 도둑질은 죄가 안 된다는 것을 통과시켰다 하자. 그것이 선인가?
성경의 예를 들면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것을 따라가는 항상 옳다고 하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한다면 민중들이 예수님을 택하지 않고 바라바를 택했던 것을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군중들 더 많은 사람들의 의견으로는 결코 예수를 택하지 않는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는 그 메시야가 정작 구원받아야 할 백성들보다 먼저 힘없이 폭력적인 죽음을 당한다는 바보 같은 그 구세주를 누가 택할 것인가? 민주주의가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라고만 한다면 민주주의는 결코 예수님을 택하지 않는다. 수퍼맨을 택한다. 바라바를 택한다.
그렇다면 사람들 백성들을 무시하면 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그분이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정답이다. 예수님은 사람들 백성들을 믿지는 않으셨지만 결코 무시하지는 않으셨다.
성경은 사람들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구원받아야 할 죄인임을 늘 말씀한다. 그러나, 그런 죄인일지라도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을 심지어 신이라고까지 하시는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그 군중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도 하고 또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도구가 될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때는 그 군중을 무시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가룟 유다를 대신할 제자를 제비뽑기 한 것이 바로 그 예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계시냐 안 계시냐이다. 숫자가 많은 편이 무조건 진리가 되는 것도 아니지만 숫자가 적다고 무조건 하나님 편이 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무조건 약자의 편만 들어주신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숫자가 많든 적든 하나님 편이 승리한다. 하나님의 말씀 만이 서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아무리 많이 모여서 아무리 옳은 의견을 내고 합의를 해도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 되는 건 아니다. 그것이 절대 진리가 되는 건 아니다.
절대 진리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중립에 서도록이 아니라 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서 있는 곳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의 편에 하나님의 말씀 편에 서도록 부름 받은 자들이다.〠
이명구|시드니영락교회 담임목사 <저작권자 ⓒ christianreview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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